2009년 03월 07일
왓치맨 - 코미디언은 죽었다

++ 어제 보고 온 후 졸면서 써 본 지극히 개인적인 왓치맨 감상.
원작을 보고 목구멍에서 맴돌던 느낌이 영화판을 보고 가닥이 잡혔으므로 거의 원작 기반의 주저리다. 간단히 한줄 요약하면 나는 영화판을 매우 재미있게 봤다.
스포일러 좀 있습니다. 원작 영화 양쪽 다.
어젯밤 뉴욕에서 코미디언이 살해되었다.
코미디언이란 유형무형의 대가를 받고 농담과 익살로 남을 웃겨주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가 받는 유형의 대가라면 돈이나 물건일 테고, 무형의 대가라면 박수나 환호 같은 일종의 사회적 인정일 테다. 코미디언은 남을 웃겨주는 사람이지 자신이 웃는 사람은 아니다. 그 예는 로어쉐크가 들었다는 코미디언의 조크에 분명히 나타난다. 우울한 사나이에게 어느 코미디언을 찾아가보라 조언했더니 그게 바로 본인이라며 울음을 터뜨렸다는 이야기. 이 영화는 그 조크를 많이 닮아있다.
조크를 듣고 웃는 이유는 많이 있겠지만 개중에서도 두가지를 꼽아보자면, 우선 비교우위를 통한 조크가 있다. 사회통념적으로 열등한 처지의 누군가를 끌어와서 우스갯감으로 삼아 자신의 힘을 확인하며 카타르시스를 얻는 경우다. 둘째로 아이러니의 조크는 말 그대로 아이러니한 상황, 즉 기대했던 것과 다른 결말이 날 때 그 이질적인 괴리감에 헛웃음을 치는 식이다. 첫번째는 비교하기 위해 대상과 자신을 나누어 정의하는 능력에 기댄 것이나, 두번째는 외부가 아닌 내적성찰로 이어진다. 첫번째는 자신과 타인을 나란히 놓고 서열을 매기기에 횡적이며, 두번째는 시간의 어느 한 지점을 기준으로 하여 앞을 예상하거나 기대하기에 종적이다. 코미디언의 조크는 말하자면 이 날실과 씨실을 직조하여 짜내는 것이리라.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조크로 가득하며 그 자체가 하나의 암울한 조크와도 같다.
이 작품에 있어 제일 큰 조크는 바로 가면 쓴 히어로들의 존재다. 영웅은 영웅이되 초능력 없는 영웅이며, 심지어는 경찰이라는 공권력에 기생하여 자라난(초대 나이트아울은 경찰 출신이다) 주제에 공권력을 부정하는 사생아 같은 야경꾼이며, 초법적인 힘을 자랑해 무법지역을 평정했으나 결국은 내부모순으로 무너지고 만 존재들 말이다. 그것도 우스꽝스러운 가면에 쫄쫄이 코스튬이라니! 남사스러워라. 그들에게 무슨 권리가 있어서 기껏 쫄쫄이 코스튬 하나 달랑 걸친 주제에 인류의 야경꾼, 감시자를 자칭하느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법 외의 존재이며 세상 평화를 위한다는 순수한 명목으로 사회의 감시자 노릇을 한다. 그들의 힘은 바로 그들이 체제 밖에 있다는 데서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부의 명령을 받아 베트남전에서 죄없는 양민을 학살하고 같은 히어로 동지들을 감시하게 되는 존재가 또 그들이다. 분명 명목은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건데, 종국에는 그 시민들 손으로 끌어내려지고 만다. 그들의 코미디는 분명 '우리 편이 아닌 나쁜 놈들'을 쳐부수는 데서 오는 카타르시스적인 조크였으리라. 그러나 결국 그들은 아이러니한 실소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 상황은 극중 코미디언의 대사로 분명히 드러난다. '저들을 지켜야지. 저들 자신으로부터.' 코미디언은 유일하게 인간의 악한 본성을 꿰뚫어보고 있는 자였다. 그는 자신이 성악설의 신자이며 성악설을 증명하기 위해 앞장선 전사라는 사실을 즐기고 있었다. 인간의 적은 규정할 수 없는 어떤 악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는 코미디언이 됐다. 왜냐하면 웃기잖아. 코미디언은 자기가 웃는 게 아니라 남을 웃기는 직업이지만, 세상을 웃기는 조크는 세상 자체를 반영하는 게 아닌가. 사람들은 자기자신의 모습인 줄 모르고 웃으니, 코미디언이란 사실 적절한 폭로가인 셈이다.
그런가하면 영화의 또다른 조크는 닥터 맨하턴의 존재다. 인간을 넘어선 두려운 존재, 신에 가까운 힘, 그런데 아무것도 못 하다니. 그것도 웃기잖아. 가면 쓰고 알록달록한 타이즈 입은 야경꾼들이 죽자사자로 뒷골목에서 악당들을 패고 있는데, 닥터 맨하턴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지구의 반을 날릴 수 있는 주제에 시시한 깡패들을 거리에서 청소하는 것조차 할 수 없다. 베트남전에서 베트콩을 몰살시키는 건 간단해도, 미국의 내부 문제에는 꼼짝도 못 한다. 이 또한, 힘의 비교우위로 인한 카타르시스의 조크에서 시작하여 아이러니의 조크로 끝나고 만다.
로어쉐크는 어떠한가. 소녀의 무고한 죽음으로부터 태어난 로어쉐크는 폭력을 폭력으로 뿌리뽑고 예방할 수 있다고 믿는 자다. 코미디언은 자신 또한 성악설 안에 포함시키고 인류의 고질적인 폭력을 조크처럼 흩뿌리는 데 비해, 로어쉐크는 폭력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사용했다. 거리낌없는 폭력, 그 자체는 코미디언과 로어쉐크가 동일하나 지향하는 바는 전혀 다른 것이다. 로어쉐크는 폭력을 폭력으로 교정하고 싶어했다. 인류의 더럽고 오염된 부분을 혐오하는 만큼, 그 부분을 도려내면 나아질 것이라 믿기 때문에 폭력을 행사한다. 그의 정의감과 올곧은 투쟁은, 다른 동료들을 '변질자'로 보이게 할 만큼 투철했으리라. 그러나 모호하게 계속 변화하는 그 로르샤하 가면처럼,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은 그의 안에 분열을 일으킨다. 신념에 투철한 만큼 그는 점점 더 정신분열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개인의 폭력으로 정화할 수 없는 크고 거대한 폭력 앞에 마주했을 때(특히나 그 거대한 폭력이 다수의 선이라는 명목을 뒤집어썼을 때) 로어쉐크는 붕괴해 버린다. 이것 또한 크나큰 조크.
힘은 순환한다. 도시의 악이라는 존재로부터 가면 히어로는 태어났고, 가면 히어로에게 개별악이 폭력으로 추방되고나자 이제는 전쟁이라는 시스템의 악이 드러난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히어로에게 바쳐진 것은 그들이 순진하게 원했던 평화가 아니라 지나치게 비대해진 그들을 향한 대중의 돌팔매였다. 이번에는 비대해진 그들 자신이 새로운 악의 가능성이 된 것이다. 대부분의 히어로들은 은퇴하거나 자멸하거나 살해당하거나 기왕 악해진 것, 좀더 상위 시스템의 악에 종사하기 위해 정부의 개가 된다. 한 사람만이 예외였다. 그자는 소멸하거나 흡수당하지 않고 시스템을 이용하여 오히려 상위 악 위에 군림하게 된다. 그 히어로의 힘은 자본, 그 히어로의 이름은 황금왕이었다.

오지맨디아스의 음모가 폭로되기 전의 이야기를 해 보자. 거대한 힘은 결국 서로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충돌마저도 견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힘으로서 설정된 것이 바로 닥터 맨하턴일 것이다. 닥터 맨하턴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사실 상관이 없다. 소련과 미국이라는 대립항을 냉전 하에 묶어둘 수 있게 만드는 무언가. 인간의 편의를 위해 움직이는 듯하지만 인간의 소유나 권리를 벗어난 존재. 그는 사실 종교나 절대선이나 자연력이나 혹은 지구 그 자체라고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가장 든든한 아군인 그가 사실은 인간의 감정에 무지하며 인간의 통제도 벗어나 있는 존재라면, 그가 적군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불안요소일 뿐이다. 그러므로 수뇌부는 어떤 식으로든 그가 우리 편이라고 선전하고 싶어한다. 대중을 속임과 동시에 자신 스스로도 속이는 것이다. 신/자연/지구는 언제까지나 인간을 배신하지 않으리라고. 그러나 기대를 저버리고 '그'는 자신을 사랑해주며 동시에 속박하는 인간으로부터 벗어나버린다.
그 존재가 무엇이든 간에, 처음 발견하고 이름 붙이고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인간이었으리라. 로리의 호소는 그 점과 맞닿아있다. 그러므로 화성에서 로리와 존의 만남은 좀더 감상적이고 감수성을 자극하는 편이 좋았을 것 같다. 그 장면에서 처음으로 닥터 맨하턴은 자신이 객체로 설정했던 인간에게서 가장 개인적이고 사소한 슬픔을 발견해내고, 그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원작에서는 로리가 어린 시절 겪었던 그 슬픔이 결국 로리라는 인간 전체를 뒤흔들고 그러한 인간적인 감정의 파편 하나하나가 결국 인간을 가치있게 만든다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렸다. 영화판은 이 점을 세심하게 살려내지 못해 아쉬운 기분이 든다. 그동안 작품 안에서 보이지않게 차곡차곡 쌓여온 감수성의 영역이 로리의 흐느낌을 통해 폭발적으로 터져나와야 하는 장면인데, 뚱딴지처럼 사랑이 지구를 구한다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간 기분.)
조크를 넘어선 곳에 센티멘털리즘은 존재한다. 힘의 논리로 우열을 가리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단계가 지나가고, 시작과 끝이 서로 다른 아이러니에 덧없이 웃고나면 찾아드는 것은 결국 연민이기 때문이다. 코스튬 히어로가 잔뜩 등장해서 액션을 해 대는 이 농담같은 영화는 그 때문에 쓸쓸함과 후회, 애상으로 가득하다. 코미디언이 살해된 후, 아무도 농담을 하지 않는다.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의 사슬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하나의 정점, 극단이 필요했다. 오지맨디아즈가 대체 어떤 현실의 벽에 부딪혀 어떤 과정을 겪으며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가 어떤 식으로, 절대선이라는 허울좋은 명목에서 탈출해 다수선이라는 영리한 변명을 계획해 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는 로어쉐크처럼 미치지도 않았고, 실크 스펙터와 나이트 아울처럼 은퇴하지도, 코미디언처럼 자신이 폭력 사슬의 일부가 되지도, 다른 동료들처럼 비참하게 자멸하지도 않았다. 그는 똑바로 현실을 보고, 그것이 옳든 그르든 자신만의 새로운 폭력과 평화의 도식을 도출해 낸 것에 불과하다. 그 와중에 모두를 위한 선이라는 순수한 히어로식 공식은 그에게서 삭제되고, 최소한의 손실로 최대한의 복지를 이룬다는 자본가적 공공선 개념이 들어섰다. 시체더미 위의 낙원 말이다. 그는 신도 왕도 되지 못하고 그 폐허 속에 박제된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원작에서 그가 택한 전법은, 끝까지 조크 답게 '외계에서 온 공공의 적'이었다. 전세계에 동시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외계 생명체로 인해 인류가 자각하여 내부결속을 다진다는 계획이었다. 영화에서는 이 부분이 변경되어 조금 더 현실적이고 섬찟한(그러나 농담과는 거리가 먼) 핵전쟁으로 변경되었다. 그 핵전쟁이 닥터 맨하턴의 힘을 복제했다는 점 때문에, 닥터 맨하턴의 역할도 조금 바뀌고 말았다. 원작에서 그는 인류를 재앙에서(사실 인류가 만들어낸 자업자득의 재앙) 구할 수 없었던 초월적인 힘을 상징했다만, 영화판에서는 결국 그에게서 나온 힘을 눈먼 손이 사용하기 때문에 인류가 재앙에 처한다는 전개가 된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다. 영화판에서는 말하자면 인류의 손을 떠난 과학기술력이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그러나 이 강대한 미스터 과학기술력은 로리 덕에 인간애에 눈을 떠 그나마 윤리적 책임에 각성한 힘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가 지구를 떠나면서 남긴 마지막 대사는 마치, 윤리의식을 담보한 과학기술이 언제까지나 인류를 '지켜보고 있겠다'라는 의미로도 들린다.
누가 감시자들을 감시할 것인가. 타인을 짓누르며 괴물처럼 팽창한 힘의 논리는 내부모순 속에 천천히 붕괴할 뿐. 오지맨디아즈가 새로 설정한 세계는 (냉전은 끝났으나) 자본과 냉소가 오래도록 지배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개인은 (가면을 버리고 사람들 속에 섞인 로리와 댄처럼) 익명성 뒤로 해체될 것이며 닥터 맨하턴은 온전히 인간을 떠나지도 인간에게 종속되지도 못한 채 지켜보기만 할 것이다. 정신붕괴를 일으키면서까지 저항하던 로어쉐크는 모순을 견디다 못해 죽음을 택했으며 세상은 당분간 웃음이 없을 것이다. 2세대인 로리와 댄이 어떤 앞날을 선택할 지는 그들의 몫이다.
영화는 후반에 가서 조금 탄력을 잃고 일부 씬에서는 '큐' 사인 받고 배우가 동작에 들어간 것처럼 조금 위화감이 드는 면이 없지않아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크와 조크 이후의 세상을 생생하게 살려냈다. 살과 피가 생생하게 튀는 무자비한 폭력 뒤로는 짙은 상실감과 애수가 배어있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악의 실체와, 악하면서도 선한 인간미의 근본. 그 사이에 신경질적으로 터져나오는 조크가 있다. 그 모든 것을 넘어선 곳에는 어쩔 수 없는 센티멘털리즘이 존재한다.
오로지 힘의 논리로 돌아가던 세계가 바로 그 힘에 의해 한번 파국을 맞은 후, 개개인이 익명성 아래 산산이 흩어져버리게 되는 쓸쓸한 종말을 그리기 위해서 센티멘털리즘은 필수일 것이다. 그 끝은 폐허 속에 포옹한 연인의 벽화처럼, 흐느끼며 서로를 굳게 끌어안고 확인하는 로리와 댄의 모습으로 완성된다. 영화에서 이 장면이 등장하지 않은 점은 좀 아쉬울 따름이다.
영화는 기괴할 정도로 집요한 폭력씬과 비장하다가도 유머러스한 음악의 활용을 통해, 원작이 방대한 텍스트와 압도적인 그림으로 표현해냈던 부분을 영화적으로 되살린다. 화면 또한 디테일한 맛이 있어서 원작의 복잡한 설정과 복선을 화면 안에 꽉 차게 채워넣어 러닝타임이 허투루 허비되지 않는 인상을 주었다. 물론 원작에 비하자면 몇몇 아쉬운 점은 있다만, 밤하늘을 날아가는 아치와 화성 위에서 부서지는 닥터 맨하턴의 유리 구조물과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로어쉐크를 살아 움직이는 화면으로 볼 수 있었다는 점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히 훌륭한 영화였다. 게다가 영화가 모든 것은 조크라는 시선을 놓치지 않고 한 축으로서 살려낸 것 같아 조금 더 점수를 후하게 줄 수밖에 없다. 영화의 전반부는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가 존재하는 카타르시스적 조크의 세상이었으나, 후반부는 결국 아이러니한 조크의 세상이 된다. 즉, 최후에 짓는 웃음은 힘의 우위를 점하려던 외적 노력이 자기자신 안을 들여다보는 내부성찰로 귀결되며 힘없이 짓게 되는 웃음인 것이다.
그리고 그 웃음이야말로 다수를 위한 선으로부터 유리되어 떠돌게 된 고독한 개개인의 웃음이다. 웃자. 피얼룩이 져도 스마일.
-- 남극에서 로어쉐크는 버젓이 나돌아다니는데 나이트 아울은 전용코트(!)까지 챙겨입는 그 장면이 의외로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추위도 못 느끼는 미친놈은 약이 없다... 라는 게 아니라, 나이트 아울의 깜찍한 코트가 마치 잔혹한 현실로부터 마음을 지키기 위한 방어막 같아서. 그 최후의 방어막마저 내던진 로어쉐크의 종말은 예견된 것이 아닌가 싶다.
-- 오프닝 타이틀 올라가며 그 짧은 시간에 보여준 전세대 히어로들의 전성기와 몰락이 왜 그리도 마음 아프던지.
-- 더 들어갔으면 난잡해졌겠지만, 검은 수송선 에피소드와 벽에 그려진 남녀그림 에피소드가 없는 점은 좀 아쉽더라.
-- 세상이 살기 힘든 건 히어로든 미친놈이든 부자든 나체주의자든 똑같은 듯.
# by | 2009/03/07 11:15 | 중년의 취향 | 트랙백(2)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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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들려줘서 고맙고, 건강한 것 같아서 다행일세. 나 전번 그대로니까 연락 하자고~.
대문자 A뿐만 아니라 다른 단편들도 정말 재밌어서 '이런 작가님을 알게 되다니 난 행운아야!> ㅡ <' <-요러고 있는데요ㅎ
사이암님 소설을 읽다보니까 아리아드와 아스테어의 다음 이야기가 너무나도 궁금해졌습니다. 이후 스토리는 모님의 글을 참조하라고 하셨는데 모님이 누군지 알 수 없어서요ㅠ_ㅠ 모님과 그분의 글 제목을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있으시다면 부탁드려요~~ 알려주세요~~~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잠이오지 않아요~~~~~!!
ㅇㅅㅇ
하이어리데스 내놓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