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제 2장 연(緣) (3)



갑자기 생각나고 있었다. 푸른 하늘, 멀리서 침침한 은빛으로 반짝이는
아델리아의 수면, 그리고 무성한 나무 아래에 치맛자락을 쥐고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던 소녀가 있다.
그 소녀는 벽 너머에서 아직도 울고 있을까.







마비노기온

제 2장 연(緣)








  검과 검이 마주치고 혹은 검들과 부딪치고 또 물러났다 다시 공기를 가르며 어지러운 발 움직임과 숨소리가 뒤이었다. 발길에 단단히 다져진 눈이 거울처럼 묘한 빛을 뿜는 궤적을 만들어냈다.
  세이라는 넋을 잃고 벽에 붙어선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 괜찮겠지? 투아하 데 다난이 만든 무기로는 치명상을 입을 수 없다고 했잖아. 마물처럼 강하니까, 아무도 다칠 리 없어. 아냐, 별일 아닐 거야. 괜찮을 거라고. 드루시온이 그렇게 말했어. >
  여러 사람이 번갈아 공격했다 피하고, 또 다음 사람들이 차례로 치고 들어가는 데도 드루시온은 물러서지 않은 채 고스란히 맞받아 치고 있었다.


  " 에리단! 자, 네 차례다. 네 힘을 보여줘! "
  < 에고 웨폰 마스터, 드루시온의 이름으로 명령은 받아들여졌다. 복종(服從). 이 내 힘을 다해 최대로 보좌하겠다! >
  그의 에레위단이 공기를 가를 때마다 작은 금빛 낙뢰가 춤추는 것 같았다.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상대가 위에서 검을 내리쳐왔다. 그러나 드루시온은 들리지 않는 조언자가 속삭임으로 폭로하기라도 하듯, 빈틈없이 허리를 틀며 검을 미끄러뜨려 막아냈다. 가늘고 뾰족한 불꽃이 튀었다. 그때마다 벽 너머에서 지켜볼 뿐인 세이라의 손가락이 흠칫거렸다.
  뒤로 몸을 저어 공격을 받아쳐 내다 말고, 드루시온이 그녀와 눈이 마주친 것은 그런 순간이었다. 드루시온은 못마땅한 듯 내뱉었다.


  " 돌아가랬더니! "
  그는 잇달아 파고드는 공격을 두툼하고 묵직한 검날로 밀어낸 후, 상대를 발로 차 떼 내 버렸다. 아주 잠깐 공격이 주춤한 틈을 타, 그는 검을 빙 휘둘러 적들과의 간격을 더욱 벌렸다. 그리고는 재빠른 동작으로 눈 언덕을 타고 넘어 달리기 시작했다.
  < 끝까지 싸우지 않는 건가, 드루시온? >
  " 에리단, 너도 알잖아. 밀레시안끼리 싸워봤자 승부가 날 리 없다는 걸. 이건 단순히 어리석은 소모전일 뿐이다. 뭔지 모르겠지만 속셈이 있어. 정령검인 네 앞에 감히 보통 무기로 나선다는 것부터가 수작을 부리는 게 분명해. "
  < 하지만… 예감이 이상하다. 공기가 떨리고 있다. 조심하도록 하라, 드루시온. >
  " 알았어. 최소한 저 말 안 듣는 누구 씨를 끌고 여기를 무사히 빠져나갈 때까진 방심해선 안 되겠지. "


  거추장스러운 눈덩이를 차내며 드루시온은 세이라와 목소리가 통할 만한 거리 앞에서 멈춰 섰다. 그 멀쩡한 모습을 다시 보자, 세이라는 조여들었던 심장이 다시 뛰는 것을 느끼며 후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드루시온이 검집으로 쾅 하고 그녀가 짚고 있던 벽을 때렸다.
  " 돌아가라고 했잖아!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
  " 하지만 나도 분명히 말했어. 지켜보겠다고… 앗! "
  때맞춰 튀어나온 세이라의 외침에 드루시온은 적절히 돌아볼 수 있었다. 에레위단이 중얼거렸다.
  < 저 검은…! >


  새카만 허공 속으로 바람이 말려들듯 쏴아 밀려가며, 그 끝에 우뚝 선 한 그림자를 드러냈다. 땅에 속한 유령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드루시온에게 덤벼들던 사내들은 이제 더 이상 그를 쫓지도 공격하려 하지도 않고 단지 조용히 그자 뒤에 버텨 서 있을 따름이었다.
  드루시온의 얼굴이 굳었다. 에레위단을 쥔 팔에 지그시 힘이 들어가며 입술이 달싹였다.
  " 어쩐지 이상하다 했지. 뭔가 속셈이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하니 이런 걸 준비하고 있었을 줄은. 그쪽도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지? "
  드루시온은 로브를 끌러냈다. 아예 검집까지 로브와 함께 눈 구덩이 속으로 던져버렸다. 에레위단이 위협을 느낀 듯 지금까지 세이라가 보아왔던 중에서 가장 크고 환하게, 추락한 별처럼 빛을 내뿜었다. 그 검으로 똑바르게 앞을 가리키며 드루시온이 빈정거렸다.


  " 그래서 직접 나를 치기 위해 온 건가? 대답해, <노래하는 검>의 주인, ……! "
  드루시온의 입술이 움직이고 자신의 이름을 들은 상대는 조용히 검을 빼들었다. 드루시온과 같은 투핸디드 소드였으나, 그 칼은 흑연처럼 온통 검었다. 바람이 움직였다. 눈을 품고 밀려든 은빛 바람이 검날에 걸려 흩어지듯 스러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세이라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아주 기묘한-
  기묘한 소리. 속삭이듯 허밍하듯, 검날이 떨리며 높고 또 낮게 울고 있었다. 아니.


  노래하고 있었다.
  세이라는 비명을 지를 것만 같은 입을 틀어막은 채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지금껏 이런 것을 보고들은 적이 없었다. 상상한 적조차 없었다. 상대의 손에 들린 투핸디드 소드는 에레위단과는 정반대였다. 꼭 흑요석이나 검은 이빨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새카맣게 어두운 검. 그리고 바람이 스칠 때마다 그렇게 그 칼은 윙윙 소리를 냈다. 악몽 같았다.
  " 돌아가! "
  공격 태세를 갖추는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드루시온이 거칠게 외쳤다. 세이라를 향한 외침이었다.
  " 너까지 돌봐 줄 여유 따위 없어. 어서, 어서 돌아가! 뒤돌아보지 말고 마을까지 뛰어! "
  " 안 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웬일로 네가 그런 약한 말을 하는 거지? "


  벽을 두 손으로 짚고 세이라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도리어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드루시온이, 다른 사람 아닌 바로 그가 손끝을 긴장으로 떨고 있었던 것이다. 식은땀이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렸다.
  " 농담하지 마. 잘 들어, 세이라. 나는 저 녀석을 이길 수 없다. "
  " 뭐라고? "
  " 저 검이 보이지? 저 검이 노래할 때마다 반드시 누군가가 죽는다. 보통의 무기가 아니야. 저건 밀레시안들의 생명을 끊고 연을 삼키고 죽음을 노래하는 검이다. 그러니까…! "
  천천히 위협하듯 다가오던 상대가 팔꿈치를 돌려 검을 머리 위로 쳐들었다. 어디, 먼저 와 보라고 부르고 있다. 순간 욱하고 마음의 여유를 잃은 드루시온은 다리에 힘을 주어 박차고 나갔다.
  " 너는 도망쳐, 세이라! "


  첫 충돌이 있었다. 금의 검과 흑의 검이 맞붙었고, 드루시온은 빙글 돌려 검을 빼낸 후 앞으로 내민 다리를 축으로 뻗어나갔다. 바람이 휘말렸다 부서져 나갔다. 상대는 묵직한 일격을 받고 상반신이 밀렸으나, 곧 침착하게 받아 쳐내고는 고투하는 기색도 없이 이내 반격했다. 상당한 실력자임이 분명하다. 좀 전의 드루시온이 그랬듯 후드로 깊숙이 가린 그의 얼굴은 좀체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다.
  흩날리는 눈발을 세워 가르며 흑의 검이 노래하고 있다. 웃음소리처럼 섬뜩했다.


  시이이이이이이잇--
  저절로 귀를 막고 싶어지는 소리였다. 세이라는 벽에 두 손바닥을 짚은 채 필사적으로 외쳤다.
  " 그만둬, 그만둬! 드루시온! "
  시커먼 두 그림자가 서로를 집어삼킬 듯이 꿈틀대며 움직이고 있었다. 공격을 막아내면 곧바로 뱀처럼 다음 타격이 검날에 맞붙어 왔다. 흔히 쇠끼리 마찰하며 튀기는 찌릿찌릿하도록 창백한 불꽃마저도 없었다. 새카만 칼날은 빛이란 빛은 모조리, 그냥 그렇게 잡아먹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듯한 순간이었다.
  " 윽! "
  한쪽에게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드루시온이었다.


  그는 균형을 잃으면서 휘청거렸다. 자세히 보니, 검끝이 드루시온의 팔과 어깨 사이 어디쯤엔가 꽂혔다 뽑혀 나오는 중이었다. 암살자는 가차없었다. 낄낄거리는 요부가 죽음을 예고하듯 웃어대는 검을 손아귀에서 한 바퀴 빙글 돌려, 다시 검날을 적수에게 향했다.
  " 이 정도로 누가 잡힐 줄 알고! "
  드루시온은 비틀대면서도 굴하지 않고 에레위단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혼신을 다한 일격은 새카만 검에 쩡 하고 가로막히고 말았다.
  쨍 하는 소리가 한번 더 들렸다.
  세이라로서는 상상도 해 보지 못한 표정, 드루시온은 진심으로 놀라 멍해진 그런 표정이 되어 에레위단을 쳐다보았다. 수호신처럼 밝고 강하던 그 검날에 균열이 가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드루시온-! 등뒤로 세이라가 몸서리치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주인 몫까지 타격을 이겨내야 했던 에레위단의 고통스러운 음성도.


  < 미안… 하다, 드루시온. 내 힘이 조금 모자란 듯하다. >
  " 에리단, 너는 에고 웨폰 중에서도 최고의 검이다. 나야말로 나를 마스터로 인정해 준 데 대해 늘 고맙게 여기고 있었어. "
  손을 짚자 붉고 역한 피가 스며나는 것이 느껴졌다. 통증 때문에 도리어 머릿속이 맑아지고 있었다. 악문 잇 사이로 숨을 몰아쉬며 드루시온은 적을 노려보았다.
  " 너, 결국 네 녀석하고는 언제 한번 끝장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지. 이런 곳에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지만. "
  지금 녀석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봐 두고 싶었다. 그러나 서서히 달이 이울었고, 구름을 연보랏빛으로 물들이는 부연 새벽빛과 그림자에 가려 그자의 머리와 어깨 윗부분만 하얗게 어른거릴 뿐, 그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드루시온은 실낱처럼 가느다란 균열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에레위단을 한번 더 힘주어 쥐었다. 손바닥에 맞눌려 오는 무게가 느껴졌다.


  " 한번만 더, 이번 한번에 모든 걸 걸자. 에리단, 도와줘! "
  < 보호막은 저 검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내 남은 힘을 모두 쏟아 부어, 공격하는 그대의 두 눈과 두 팔이 되겠다. 그대 뜻대로! >
  드루시온은 하얀 숨결을 내뱉으며 검자루를 고쳐 쥐었다. 한껏 몸을 웅크렸다가 방어를 포기한 움직임으로 힘을 가득 실어 치고 나갔다. 암살자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드루시온은 검을 휘둘렀다. 맞은편에서 흑의 칼날도 노래를 부르며 뻗어 나왔다.
  " 드루시온, 그만…! "
  세이라는 덧없이 외쳤다. 할 수만 있다면 멈추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류트를 들려주었다, 힐러의 집에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서서 아이는 괜찮냐고 물었다, 그들은 이 땅에 연을 이으며 살아간다고 알려 주었다. 그런 그였다. 그런 드루시온이 그녀의 눈앞에서 등을 보인 채 무너지고 있다. 마지막 희망인 에레위단은 무력하게 허공을 베어냈을 뿐이었다.
  반면 상대의 칼은 드루시온을 놓치지 않았다. 드루시온은 상대와 서로 가깝게 검을 교차한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 큭…! " 낮은 신음과 함께, 배에 들이박힌 칼날을 적시며 피가 검붉게 치솟았다. 드루시온은 천천히 넘어지듯 쓰러지고 있었다.
  " 안 돼! "
  세이라는 벽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이미 손의 아픔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고 있었다. 두드리다 말고 손가락으로 벽을 긁으며 그녀는 울먹이는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 드루시온, 안 돼! 일어나, 드루시온! 일어나, 여기로 돌아와! "
  그의 상반신마저도 꿈틀거리며 뒤틀리다 앞으로 푹 엎어져 버렸다. 그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주위의 흰 눈이 붉고 검게 물들어가고 그가 놓친 검이 금빛으로 경련하듯 격렬하게 깜박이는 것을. 세이라는 울면서 벽에 매달렸다. 차가운 눈을 품은 바람이 그녀의 뺨을 얼어붙게 할 때까지 계속, 계속 소리치고 또 소리치며.
  " 안 돼, 돌아와…. 드루시온, 돌아와 줘! 부탁이야. 제발… 드루시온! 일어나! 아아아아! "









  소리 없이 눈발이 나부꼈다. 부드러운 긴 검은 머리카락이 어둠 속에 뒤섞여 감싸줄 듯 펼쳐졌다. 차디찬 눈밭에 누운 채, 드루시온은 새카만 망토를 발 밑까지 끌리도록 걸친 젊은 청년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는 드루시온만이 들어줄 수 있는 목소리로 애타게 그를 부르고 있었다.
  < 눈을 떠라! 정신차려, 드루시온! >
  그의 등에서는 날개가 흔들리고 있었다. 깊은 자색으로 빛나는 금속 날개였다. 드루시온은 자신이 흘린 뜨거운 피가 쌓인 눈을 녹이며 차차 식어 가는 것을 느끼고, 어렴풋이 미소지었다.
  " 미안… 하다, 에레위단. 이렇게 되어버려서…. "


  대답 대신 정령은 그의 곁에 몸을 숙인 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눈 위에 꽂힌 검이 금색으로 희미하게 떨었다. 심하게 손상을 입은 투핸디드 소드는 거미줄처럼 균열을 더하고 있었다. 에레위단이 고개를 저었다.
  < 그대와 나는 서로를 주인과 무기로 선택했다. 나는 그대의 곁에 서서 언제나 함께 싸웠고, 그대는 내게 살아있다는 걸 가르쳐 주었다. 이 눈의 차가움도, 지금 이 어쩌지 못할 혼란, 욱신거리는 마음의 통증도 모두 그대가 알려준 것이다. 그런데 이건 뭐지? 지금 느껴져 오는 이것은 무엇이지? 나의 주인인 그대가 지금 나를 떠나려 하는 것인가? 나는 더 이상 그대의 검이 될 수 없는 건가? >
  " 운이 좋다면, 너와 내 연이… 이 땅의 연이 아직, 아직 이어져 있다면 또다시…. "
  < 나의 유일한 주인. 그대를 잃을 수는 없다, 드루시온! >


  에레위단의 음성은 비통했다. 주인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나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그러나 드루시온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갑자기 생각나고 있었다. 푸른 하늘, 멀리서 침침한 은빛으로 반짝이는 아델리아의 수면, 그리고 무성한 나무 아래에 치맛자락을 쥐고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던 소녀가 있다. 그 소녀는 벽 너머에서 아직도 울고 있을까. 그 정답고 그리운 땅에서 진홍빛 황혼이 추억처럼 밀려와 눈앞에 피어올랐다. 드루시온은 고통을 억누르듯 픽 웃으며, 눈을 감아버렸다.
  " 바보같이. 뭐가 고향이야…. 꿈꾸게 하지 말라고. "
  얼음결정을 품은 돌풍이 세차게 몰아치며 에레위단의 무거운 망토를 나부껴 펄럭이게 했다. 잠시 고개를 돌렸던 검의 정령은 주인이 미동도 신음도 없이 잠잠해진 것을 알아차렸다. 두 눈이 굳게 감겨 있었다.


  < 드루시온? 드루시온! 대답해! >
  바람에 떠밀려온 눈발이 그의 얼굴 위에, 머리카락 위에, 엷게 뒤덮이고 있었다.
  < 드루시……, 마스터. > 에레위단은 그를 감싸듯 깊이 몸을 숙였다. 이제 꼼짝도 하지 않는 주인의 이마에 입맞췄다.
  < 편안한 안식을. 나의 마스터에게. 그리고 나에게. >
  정령검이 그 곁에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다. 그리고 검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다.
  아무것도. 새벽 안개가 물러나고 난 목초지 위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이슬을 증발시키는 햇빛이 내리 쬐었다. 양털을 깎을 때 손목까지 파묻히는 그 폭신폭신한 느낌도, 비탈길을 뛰어내려갈 때 아이들이 내는 웃음소리도 여전했다. 세이라는 무릎 위에 손깍지를 끼고 앉아 이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있었다. 변하지 않았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는.
  " 그게 누군데? 처음 듣는 이름인걸. "
  딜리스는 열이 내리자 다시 말썽을 피우고 싶어하는 에보니와 채트를 돌보느라 정신 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긁힌 상처에 약을 발라주며 그녀는 사내애들이란 정말, 하고 한숨 섞어 중얼거렸다.


  " 내가 팔을 치료해줬다고? 그럼 그런가보지. 알다시피 바쁠 때는 여기도 붐비잖니. 그런데 네가 말한 그런 인상착의는 기억에 없는데 뭔가 잘못 안 건 아니고? 얘, 에보니! 위험하니까 그것 얼른 내려놓지 못해? "
  피르아스의 여관 장부 위에는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드루시온이라고 휘갈겨 쓴 서명이. 그러나 노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글자 위로 말라붙은 잉크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 아하, 장부를 기입할 때 잠깐 졸았나 보다. 돈만 확실히 치렀다면 됐어. 피르아스 아저씨는 계산에는 깐깐하셔서 말이야. 뭐? 하지만 그렇게 물어봤자~ 정말 모르겠는걸. "


  단정한 얼굴 위로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피르아스 앞에서는, 트레보가 지나다 들른 모양으로 자신의 무용담을 허풍 섞어 떠벌리는 중이었다. 그는 어깨를 떡 벌리고 크게 웃었다.
  " 하하하! 그러니까 정말 위험했다니까요. 저야 뭐, 이미 아홉 살 열 살에 던전을 탐험한 데다 레이널드 선생님의 자랑스러운 수제자였던 몸이지만. 그래도 말썽꾸러기 아이를 혼자 구하러 가는 데는 간이 다 떨리더라구요. 그러나 제가 그런 일로 눈 하나 까딱할 사람입니까. 멋지게 채트를 구해내지 않았습니까. 이걸로 딜리스도 절 보는 눈이 달라졌으면 좋겠는데. "


  세이라는 눈을 굳게 감았다 떴다.
  변하지 않은 풍경, 그러나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이제 세이라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평범하게 빵을 굽고 물을 긷고 양털을 깎고 천을 짜고 있는 자신들 사이에 섞여 그림자처럼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검을 등에 지고, 혹은 깊이 눌러쓴 후드 속에 표정을 감추고, 조용히 머물렀다 떠나는 이들. 그들이 사실은 지금도 여기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았다. 이곳은 자신들만의 땅이 아니었으니까.
  < 이 자리에 있었는데. 바로 여기에. >
  세이라는 멍하니 시선을 앞에 두고 있었다. 지금 그는 결계의 벽 너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내리고 또 쌓이는 영겁의 눈이 그를 감추고 데려가겠지. 그녀는 그 광경을 선하게 그려볼 수 있었다. 눈발이 나부끼며 그의 검은 옷자락을 차갑게 식히고….

  " 세이라, 응? 세이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
  작은 손이 잡아 흔드는 바람에 세이라는 퍼뜩 생각에서 깨어났다. 데이안이 별 일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 대낮부터 눈뜨고 자는 거야? "
  " 으, 응? 아니. 왜 불렀어? "
  데이안은 콧등을 긁적이며 쑥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화난 듯이 불쑥 말했다.
  " 거, 그거 말야. 아니, 저 뭐랄까. 내가 그런 데 은근히 관심이 많잖아. 후, 훌륭한 전사님이 되려면 이것저것 많이 알아야 하니까. 그러니까 꼭 내가 연주해 보고 싶다는 건 아니고! "


  점점 더 횡설수설하다가, 에잇 모르겠다 하는 표정으로 데이안은 불쑥 류트를 가리켜 보였다.
  " 저거! 말콤이 준 새 거지? 별로 궁금하진 않지만 그래도 봐 줄 테니까 좀 줘 봐. "
  그 말투와는 달리 세이라에게서 반짝반짝 빛나는 류트를 받아들자, 데이안의 눈은 금세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볕에 그을린 손가락으로 여기저기 서툴게 만져보더니, 급기야 현을 죄다 잡아뜯을 기세로 튕겨댔다. 세이라는 도로 소년에게서 악기를 빼앗아 왔다.
  " 얘는! 다 부수겠다. 그렇게 하는 게 아냐. 잘 봐. 이렇게 잡고 한 손으로는 이쪽을 눌러주고…. 손가락을 기억해 뒀다 따라해 봐. 도레미파…. "



    다시 봄이 되어 히스와 넝쿨장미가 피면
    나 찾아오리라, 떠나왔던 이 땅으로




  자연스럽게 노래가 흘러나왔다. 데이안은 감탄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세이라를 바라보았다. 낯설고도 또 그리움으로 가득 찬 선율에 실려 세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소리가 머물렀다가는 포플러 잎새처럼 흩어져갔다.



    피곤한 나그네는 고향의 둔덕에 기대 눈을 감는다
    도시의 쇠내음 쩔렁거리는 금화소리 모두 소용없었네
    이렇게 쉴 곳 내주는 가슴은 고향의 풀과 나무들뿐이라네
    그러나 종소리는 탄식하며 울었다




  시드 스넷타의 끝없는 겨울 풍경이 세이라의 눈앞에 선명히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벽 앞에서 무릎꿇고 몸을 떨고 있는 그녀 옆으로, 그 남자들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스쳐 지나갔다. 마치 그림자나 망령들처럼. 추위 때문에 목구멍이 작고 미세한 바늘로 가득한 것만 같았다. 세이라는 악에 받쳐 눈을 한 움큼 긁어 쥐고 던졌으나, 도중에 산산이 부서져 가루처럼 흩어질 뿐이었다.
  " 무슨 짓을 한 거죠? 왜 그랬어요, 대체 왜! 그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들은 아무런 힘도 없는 그녀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그저 새벽의 회색 여명 속으로 사라져 갈 뿐이었다. 그중 한 명이 잠시 발을 멈췄다. 그자의 음성이 바위처럼 낮고도 불투명하게, 눈보라 사이로 나부끼듯 들려왔다.
  " 잊어라. 에린의 딸이여. 너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일이다. 그리고 잊게 될 것이다. "


  아니, 잊지 않아. 그녀는 생각했다.
  아프고 화끈거리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짚은 채 그녀는 몸을 깊숙이 웅크렸다.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약속했으니까. 그 모든 투아하 데 다난이 잊는다 해도 자신만은 잊지 않을 것이다. 그와의 연을 다시 이어, 언젠가는 돌아들어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라도 만날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잊고 싶지 않았다…….



    아- 그 소녀는 이미 없다네- 사랑하는 마노아

    노래가 되어 날아가 버릴 때까지 속삭임을 이어
    아침햇살이 무덤을 감싸고 엎드린 나그네의 백골을 쓰다듬었네
    드디어 그는 돌아와 사랑하는 신부와 맺어졌다네
    그리운 고향 땅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지의 품에서 영원히 함께

    나의 심장 나의 신부 나의 사랑하는 마노아-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세이라는 고개를 들어올리다 말고 아픈 표정을 지었다.
  " 아얏. " 손가락이 따끔했다. 손에서 퉁기고 있던 류트 현이 끊어졌던 것이다. 티잉- 하는 가볍고도 맑은 울림을 내며 현은 팽팽한 탄력을 잃고 늘어졌다. 세이라는 얼결에 다친 손가락을 입가에 물고 울상을 지었다.
  " 아이 참. 고친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현이 끊어졌어. "
  " 그야 세이라는 물건을 험하게 다루잖아. 워낙 덜렁대니 섬세한 악기라고 남아날 리가 있어? 류트가 불쌍해. "
  아무렇지도 않게 핀잔을 주다 말고 데이안은 화들짝 놀라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세이라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그녀는 현이 끊긴 류트를 손에 멀거니 든 채 마치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왜인지 모르지만 눈물이 멎질 않았다. 오히려 어쩔 줄 모르게 된 데이안이 그녀의 손에서 류트를 빼낸다, 살짝 베인 손가락을 들여다본다, 분주하게 법석을 떨어야 했다.
  " 왜 그래, 세이라. 응? 어디 아파? 왜 그래, 세이라. 울지 마, 응? 울지 마아. "
  나 찾아오리라, 떠나왔던 이 땅으로.
  숲에서 불어온 바람은 두 사람을 휘감고 그리고 메아리치며 아득히 은은하게 아델리아 냇물 위로 사라져 갔다. 그리운 이 땅, 그리운 고향이 기억하는 한.









================


0. 지금껏 드루시온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셨던 분들, 낚이셨습니다.(...)
1. 오프닝 격인 1, 2 장이 끝났으니 이젠 좀 숨돌려가며 천천히 올려도 되겠죠.
2. 게임상 설정과 소설상 설정은 기본적으로는 같지만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매체가 다르기 때문에, 경험치와 맵과 레벨로 존재하는 캐릭터나 세계를 소설에 있어서 백퍼센트 똑같이 적용한다는 점은 불가능합니다. 이 점을 유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ON
http://psyam.egloos.com
copyright©Nexon,devCAT; Mabinogi
since 2004-2006; all rights reserved(c) Psyam

by 사이암 | 2006/09/19 17:38 | 장편 - ON | 트랙백 | 덧글(24)

트랙백 주소 : http://psyam.egloos.com/tb/2706207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sinker at 2006/09/19 17:40
너무 그림이 잘 그려져서 문제.. 이미지가 사람 잡아요 ㅇ>-<
Commented by aida at 2006/09/19 17:49
맞아요 이씬 진짜정말 사람잡는다니까요 ㅇ>-< (같이 벌렁)
Commented by Min。 at 2006/09/19 17:57
낚인건가요! orz
Commented by 플루토 at 2006/09/19 17:58
저도 낚인 사람 중 한명이었... (...)
Commented by 세이트 at 2006/09/19 18:13
저도 낚였습니다. 결국 첫 장면으로 돌아가는군요...
그런데 싱커님 말씀대로 정말 그림이 너무 잘 그려집니다.
앞으로 계속 보려면 심장에 무리가 갈 것을 각오해야겠네요.
Commented by 자갈돌 at 2006/09/19 18:21
헉.. 낚였군요 orzorz
Commented by 와디 at 2006/09/19 18:28
나나나 나나나낚엿습니댜 0<-<
Commented by 티갈 at 2006/09/19 20:23
[억지로 소화되(...)버린 미끼에게 원망과 탄식과 슬픔을]
...그렇습니다. 낚였...크엘룩.
Commented by 달고은술 at 2006/09/19 20:27
낚였군요..;; 드루시온이 환생할 줄 알았어요..;;;
Commented by 에리카 at 2006/09/19 20:42
드루시온이 죽을줄이야...엉엉;ㅁ;
마지막 세이라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어쩐지 너무 슬퍼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ㅁ; 가슴이 너무 아파요
Commented by 루나비오 at 2006/09/19 20:48
에.....전 세이라가 사실은 평범하지 않은, 모 만화를 예로 든다면 로x트 밀레시안같은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봤는데...
그래서 세이라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죠..
Commented by 크바시르 at 2006/09/19 21:25
어이쿠, 월척이네요. ㅠㅠ
Commented by 세이레인 at 2006/09/19 21:27
ㅠ_ㅠ..낚여버렸군요!! 크흑 orz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6/09/19 23:19
전 '바보같이. 뭐가 고향이야…. 꿈꾸게 하지 말라고.'에서 피를 토했습니다. 그나저나 정말 사랑스러운(..)반응들 >-<-0
Commented by 아울양 at 2006/09/20 01:12
피깃지참은 매너! (흑흑)
Commented at 2006/09/20 11:4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사보 at 2006/09/20 17:47
보는 내내 심장에 무리가. ㅠ_ㅠ 전부 크리티컬입니다.
Commented by 라린 at 2006/09/20 21:46
아.. 진짜 마비경력 2년반개월에.. 다시 보니..초보때도 생각나오.. 소설이 제 마음에 와닫습니다.

하.지.만.!


낚인건 잊지않겠다.... ㄱ-..(우울모드)
Commented by 이젤 at 2006/09/20 21:58
으아~ 낚였다아~;ㅁ; 당연히 드루시온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있었는데.. 오프닝이라구'ㅅ' 꺄아아앍ㅠ그래도.. 너무 재밌어요ㅠㅠㅠ
Commented by 쥴이 at 2006/09/21 07:06
orz 저도 낚여버렸군요;ㅅ; 드루시온 멋졌는데..미소년에 강함까지;ㅅ; 이잉 슬퍼요슬퍼요
Commented by 세이엔 at 2007/02/10 20:05
......저, 정말로 낚인 건가요(머엉) ....흐흑; 전 저 남검이랑 드루시온이 정말로 주인공인줄로 알았다구요orz;;;
Commented by 세상넓다 at 2008/11/05 12:19
나-나-나- 낚였습니다?! 무려 1년 9개월이 지난 지금 한명을 더 낚으셨군요. [..]

소설이 마음에 참 부드럽고 따스하면서도 슬프게 와닿는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사이암 at 2008/11/05 14:55
낚여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Commented by :) at 2009/08/17 23:40
3년이 지난 지금.. 여기 낚였습니다 ;ㅁ;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