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7월 05일
간략감상
1. "<항우본기>와 <자객열전>, 결국 이들 실패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마천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었다던 항우는 왜 해하 싸움에서 사면초가의 궁지에 몰린 끝에 제 손으로 제 목을 찌르고 말았을까? 자객 형가의 독 묻은 칼 끝에 폭군 진시황이 죽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이 글을 쓸 때에 사마천의 마음 속에서 휘몰아나가던 상념은 어떤 것이었을까? 정의는 왜 반드시 승리하지 못하는가?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정작 붓을 떼고 나서도 사마천은 나비를 놓치고 만 소년의 안타까움을 지녔을 것이다. 나비를 잡으려는 아이의 간절하고 조마조마한 심정이 역사 앞에 선 그의 마음이었다면, 눈앞에서 나비를 놓쳐 부끄럽기도 하고 화도 나는 것은 어느 한 순간 뜻하지 않게 역사가 제 궤도를 벗어나 빗겨갈 때에 느끼는 좌절감과 무력감이었으리라. 과연 역사의 신은 있는가? 역사 속에 정의의 힘은 존재하는가?"
-- 정민. 비슷한 것은 가짜다. 태학사. p67
실패한 영웅들 이야기를 쓴 사마천도 사마천이고, 그 사마천의 글을 곰곰이 되새기는 연암도 연암이고, 그 연암의 글을 다시금 현대에 되살려 풀이해주는 정민도 정민이다. 그러므로 실패를 두려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러다 쓰러지고 실패하고 참담하게 구른다고 누가 알아주느냐고 조급해 할 것 없이, 미래는 모두 기억해 줄 것이다. 우리가 저항하는 모든 것은 의미가 있다.
2. 왓치맨(Watchmen). Alan Moore| 정지욱 역| 시공사그래픽 노블이라는 생소한 혀꼬부라진 양키말 때문에 호기심이 생겨 사 봤다. 이게 20년 전 작품이라고? 거짓말.
작품의 틀을 구성하는 것은 늙고 지쳐버린 히어로들에 대한 만가다. 가면과 코스튬 뒤에서 악과 대항하여 싸우던 히어로들은 2차 세계대전을 축으로 하여 크게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냉전 시대에 와서는 완전히 스스로 와해되고 만다. 그들이 사라져간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한두 가지가 아니다. 드라마나 만화에서처럼 '악은 사라졌다. 정의는 영원하리!'하고 하하하 웃으며 다함께 손을 잡고 아침해가 떠오르는 동쪽 벌판으로 달려가며 눈부시게 디엔드 자막이 흐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현실 속에 들어온 히어로들의 삶은 만만하지 않다. 눈에 보이는 뚜렷한 '악역'의 종말, 냉전에 대항하기 위해 거대체제가 되어버린 시스템의 압박, 시민들의 적개심. 기타등등. 그들이 히어로가 된 동기가 다양하듯, 그들이 몰락해간 과정 또한 다양하다. 세상은 왜 히어로를 필요로 했고, 또 히어로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는가. 본색을 거부하고 가면과 코스튬을 통해 '초인'을 만들어낸 그들의 분열증적 자아와 마찬가지로 세상 또한 분열증을 앓고 있다. 기껏 뒷골목 건달 깡패 몇을 잡는다고 세상에 정의가 서는 건 아닐 것이다. 히어로들은 필사적으로 선과 악을 구별하고 정의내리려 애쓴다. 세상 어딘가에는 분명 악의 근원이 있어서 그걸 파괴하면 반드시 선이 승리하리라고.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정부의 용병이 되어 베트남전에서 아이들을 죽이고, 누군가는 자신의 히어로 이미지를 팔아 사업을 하여 사회에 환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찾는 절대악은 거대한 이념 히스테리 속에 삼켜져 세상 전체로 편재되고 개인 내부로 내재되고 말았다. 마치 로르샤하 테스트처럼 모호하게. 그리고 어느 한 놈은 세상의 우울증을 고치겠다며 멀쩡하게 미쳐버리고 만다.
책 속의 컷만화를 보고 자란 이들이 가면과 코스튬을 뒤집어쓰고 현실 속으로 튀어나와 히어로가 되었다, 그들의 현실은 다시 우리에게는 책 속의 컷만화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는 현실 속의 현실을 그린다. 그러나 그들이 늙고 지쳐가며 굴복해버린 현실은 우리의 현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통쾌하고 울화가 치밀며 비장하고 또한 슬프기 그지없다.
등장인물 중 한명이 보고 있는 만화라는 식으로 소개되는 또다른 책 속의 책인 검은 수송선 이야기도, 책 전체의 리얼리티를 끌어올려주는 텍스트 자료들도 흥미진진.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왓치맨들의 결말은 암담하기 짝이 없으나 검은 수송선 이야기처럼 절망적이지는 않다고 애써 생각한다. 결국 참화 속에서도 사람은 살아남을 것이다.
# by | 2008/07/05 12:03 | 중년의 취향 | 트랙백 | 덧글(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