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알모도바르 감독의 '내가 사는 피부'. 여전히 아름답고 강렬한 색채(원색이 어지러운 듯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붉은색이 포인트가 되는), 스페인의 풍광 고건물 거리 돌벽을 좀더 아름답게 찍어내겠다는 듯 집착하는 시선, 감수성을 뒤흔드는 고혹적인 음악으로 가득 찬 영화였다. 그러나 몸에 대한 강박과 인위적인 설정과 자극이 극대화 된 채 산산히 흩어져서 결론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시쳇말로 표현하자면, 아스트랄했다.
내가 본 한도 내에서 말하자면, 그녀에게와 나쁜 교육의 계보를 잇듯 감독은 여성의 몸을 극단적으로 학대하고 범하며 파괴해 버린다. 동시에 여성의 몸을 동경하는 부외자인 남성의 성조차 조롱하여 능욕한다. 그런데도 뭔가의 이상한 블랙박스를 통과하여 나온 아웃풋은 모순되게도 '젠더'로서의 여성을 향한 초월적이며 병적인 경외와 갈망인 것이다. 거의 나이브할 정도로. 대체 무엇을 어떻게 거쳐서 그런 결과가 나오는지 항상 의문이 드는 이유는, 바로 그 '과정'이 매우 애매한 탓이다. 끔찍할 정도의 폭력과 관음과 보복(그러나 아름답게 포장된)을 통과제례처럼 거치면 음악과 슬픔과 상처를 세례로 받아 결국 나도 모르게 설득당해 마지막에는 잔잔한 슬픔만이 남는 것이다. 왜? 나도 몰라. 모르니까 알모도바르인 것이다.
이번 영화는 정말 그 과정이 더욱더 진화하여 매우 아리송하며 찜찜한 뒷맛이 남는다. 상당히 모호하고 해체적이며 이전보다 더 직접적인 능욕으로 가득 찬 이미지의 성찬을 씻어내기에는 전체적으로 건조하고 밋밋하지 않았나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메라가 방관자처럼 뒤로 물러나고, 그녀가 울며 마지막 대사를 하던 엔딩 씬이 기억에 남는다. 감정을 직접적으로 주입하지 않고 놀람과 절정 직전에서 씬을 끊어내는 연극적인 연출은 늘 참 좋다. 매우 부조리하고 아이러니한 상실 속에 빠진 인물들 또한. 소통을 상실한 채 피부 한 겹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고 괴리된 채 떠돌다 자기자신마저 잃고 사라져간다. 나 자신은, 그리고 관계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가.
이번 영화의 또 하나의(그리고 제일 중요한?) 서프라이즈는 바로 안토니오 반데라스. 그 느끼하며 객기 충만하던 젊은 배우가 정말 맞나 싶더라. 중년이 되더니 완전 번데기 애벌레 되듯 탈바꿈하여 눈빛의 포스가 장난 아니다. 그의 흑역사인 팬텀은 잊어줄 수 있겠다.
나쁜 교육을 다시 보고 싶다. 이것도 자극적인 소재에 비하면 참 뜬금없고 모호한 이야기이긴 했는데, 후폭풍처럼 길게 여운이 남는다. 마지막까지 보고나면, 주체로서 발화하지 않은 다른 인물의 시점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며 그 또한 슬픔으로 가득 찬 이야기로 보여서 본 지 꽤 시간이 지나 스토리고 장면이고 다 잊었는데도 그 애잔한 기분만이 남아 계속 어른거린다.
2. 돼지의 왕. 이 작품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전율? 학교라는 작은 권력의 놀이터 안으로 현미경을 들이대고 무한히 관찰해본다. 그 현미경에 비친 인간군상은 저항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을 둘러싸고 처음에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처럼 영웅을 탐색하고, '친구'에서처럼 작은 분자가 동등하게 뭉친 저항동료를 갈망하다가, 마침내는 자포자기한 듯 자신들의 모습을 돼지에 투사한다.
그리고 돼지들에게는 투견에 맞설 수 있는 근성과 반항기질을 갖춘 왕이 필요했다. 이 불공평한, 움직일 수 없는 수직적 세상을 밑에서부터 거침없이 드릴처럼 파고 솟구치는 돼지무리의 이탈자가. 그에게 요구되는 건 조직을 규합할 리더십도, 전략을 짤 지성도, 외부의 더 큰 권력(교사라던가 부모)을 끌어올 만한 수완이나 너른 시야가 아니었다. 그저 또래보다 일찍 세상의 비리고 거친 맨얼굴을 보아 주체할 수 없는 악과 독기로 물어뜯을 적을 찾아 헤매는. 그건 즉 '괴물'이었다.
참 슬프고도 가혹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함부로 말을 꺼내기 힘든 이야기였다. 권력 앞에 필사적으로 처세술을 세워가는 그들의 모습 위로 우리가 아는 그 어떤 상황이라도 모습을 바꿔 거울처럼 피어오르는 탓이다. 개인적인 투쟁 외 더 큰 바깥쪽 이야기까지. 심지어는 변절자와 방관자와 비겁자의 모습까지. 그리하여 폭압 앞의 희생제의는 완성을 이루었다. 왕은 죽어야 한다.
모르겠다. 사실 매우 직설적인 이야기라 뭐라고 덧붙여봐야 너저분해질 것만 같다. 소재 자체가 특이하거나 완전히 새로울 것 없지만 그걸 확고한 '말하고자 하는 바'에 기대어 짜고 기워서 새롭게 재정립해낸 솜씨가 대단하다. 돼지와 괴물과 왕에 대한 은유도 매우 직관적. 지금은 흔한 은유이긴 하나 강력한 서사와 서사 사이를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이어주며 오싹한 연출도 이끌어내는 장치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그 생경한 그림이, 거칠어 보이지만 사실적이고 매우 표정과 동작과 움직임이 디테일하고 리얼한 그림이 몰입도를 강화했는데 뚝뚝 끊기는 프레임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의 호흡을 빼앗는 힘을 지녔다.
시간을 두고 좀더 생각해 봐야겠다. 내게는 작년 최고의 영화 중 하나였고(무엇보다도 빈틈없는 연출력과 화면전환과 서사에 있어 완성도가 매우 높아서 두근거렸다.), 이번 주말에 아트하우스 선재에서 상영하는 모양이니 관심 있는 분들은 보시길 권합니다. 지금도 그 마지막 대사와 연출이 기억에 남아 지워지질 않는다. 앞으로도 잊지 못할, 처음 말했다시피 전율이 되어.
최근 덧글